이짓거리도 벌써 몇년째인지. 자신이 몇개의 글라스를 닦고 있는지를 새던 성우는 마지막으로 내려놓은 잔을 툭, 손끝으로 치며 눈을 굴려 대각선에 앉아 있는 손님을 쳐다봤다. 눈에 띄는 푸른 머리. 저 머리를 보고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던 시기가 있었지. 하지만 그것도 벌써 먼 옛날이다. 지금의 그는 그저 과거의 영광에 심취한 정신병자일 뿐이지. 피식, 성우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려 푸른 전등들의 빛을 받고 있는 수많은 값비싼 술들을 바라보았다. 애정 어린 손길로 그것들을 만지며 먼지를 닦아내는데 톡톡, 누군가 잔을 쳐 자신을 부른다. 고갤 돌리니 푸른 머리의 남자, 류성민이다. 성우는 딱히 끌리지 않는단 표정으로 고갤 비틀고서 성민을 쳐다본다. 성민은 썬글라스 위로 눈썹을 찌푸리며 입..
취한 시영이 비틀비틀 제대로 서지 못하고 그를 지탱해주는 친구들이 멀리서 담배를 피며 등 돌리고 있는 헌철을 부른다. 그가 돌아보자 뭐하냐는듯 시영을 향해 고개짓하는 그들. 헌철이 내가 왜. 라고 대답하자 그들이 인상을 구긴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콜택시를 부르는 그. 그들이 시영과 장비들을 헌철에게 던져주곤 담배 피러 가버린다. "형. 어디사세요. 집이 어디세요." 헌철이 귀찮다는 듯 시영을 흔들며 묻지만 시영은 웃을 뿐이다. 아씨 뭐야 진짜... 콜택시가 도착하고 하는 수 없이 시영과 함께 택시에 올라타서 제 집 주소를 부르는 헌철. 모여 담배 피던 친구들이 그를 보며 손을 흔든다. 개새끼들... 장비들과 시영을 등에 지고서 헌철이 후들후들 거리는 다리로 겨우 제 방으로 들어간다. 도착하자마자 시영을..
지잉, 열리는 엘레베이터문. 헬멧을 쓴 훈기를 의식치 않고 내리는 두 남녀, 한눈에 보아도 고급진 풍채다. 엘레베이터에 올라타 현수가 적어준 쪽지에 적힌 층수를 누르는 훈기. 문이 닫힌다. 방황하던 시기에 운 좋게 그 애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퀵을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성우에게 배웠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은 현수에게 배웠다. 좋은 녀석들이었다. 마치 그간의 방황이 모두 이 애들을 만나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가족과 같은 녀석들이었다. 딩, 엘레베이터 소리에 훈기는 고갤 들지만 벽면에 적힌 숫자는 다른 층수다. 문이 열리고 엘레베이터에 타는 벨보이. 훈기는 힐끔 그를 쳐다보다가 괜히 눈이 마주칠까싶어 금방 고갤 돌린다.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자유로워진 느낌이었고. 더이상 누군가의 ..
고요한 숲속, 전날 온 비로 인해 흠뻑 젖었던 나무들 사이에서 짙은 풀 냄새가 진동한다. 돌 하나하나 둘러싼 이끼들, 몸을 숨긴 채 소리내어 우는 풀벌레들. 그 속에서 홀로 소총을 들고 엎드려있는 훈기가 있다. 온통 초록빛의 공간에서 훈기의 금발 머리에 유독 눈에 띈다. 그러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 소총을 든 훈기의 손은 부들부들 떨며 제대로 된 조준을 맞추지 못한다. 제 스스로 총을 들었으나 막상 대상을 쏘는 과정은 상상 그 이상으로 힘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일단은 당겨? 다리를 맞든 허공을 쏘든 일단 쏘고 볼까? 그럼 달아나겠지? 달아난후엔 어떻게 잡지, 저것은 나보다 빠르고 무엇보다 나같은 어설픈 사냥꾼들에게 얼마든지 맞서봤을... -탕! 머릿속 생각이 맺..
컴컴한 저택 안, 그때 촛불이 나타나며 불빛이 하나 둘씩 나타난다. 그때 다급하게 촛불을 든 하인들을 대표하는 집사에게로 달려오는 남자, 현수다. "훈기는? 아직 못 찾았어?" "네...지금 바깥을 찾아보는 하인들도 있으니..." 현수는 그의 말을 마저 다 듣지도 않고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것일까. 책임감도 끈기도 없는 나를 각성시키기 위해 가정교사가 너에게 회초리를 들 때부터? 그런 너를 보며 가엾단 생각보단 드러난 다리를 보며 발정한 순간부터? 너의 눈물맺힌 원망어린 시선을 보며 희열을 느낀 순간부터? 그 뒤로 나는 비열한 방식으로 너를 사랑했다. 네가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일부러 가정교사를 열받게 했으며, 네가 보고 싶으면 사고를 쳤다. 네가 몰래 우는 곳간에서 몰래 너를 훔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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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 않고서야 살아갈 수 없는 날들이었다. 네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내 곁을 떠나고 2년간에 내 시간은 네가 떠난 그 시점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않았다. 내 곁을 지켜주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내게 지쳐 떠나갔다. 그럼에도 전혀 너를 잊어야겠단 마음이 서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너와의 시간들을.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가야지 않겠어?" 또 멍... 기껏 고기 먹여놨더니 가게에서 몇발자국 걸어나오자마자 또 넋을 잃고 서있는 진우를 보고서 더는 못 봐주겠다는듯 준영이 쓴말을 뱉었다. 진우가 고갤 들자 인상을 쓰고 있지만 쓴말을 뱉고도 감당하지 못해 살살 떨리고 있는 그의 입가가에 눈에 밟혔다. 진우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애쓸 필요 없어. 누가 애써달래?" "뭐? 사람이 기껏 걱정해..